수백 명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생명선'을 향해 질주한다. 술래가 뒤돌아볼 때 몸을 움찔거린 이들은 사방에서 날아든 총격에 피를 튀기며 쓰러진다. 보는 이들마저 호흡을 멈추게 만드는 살육의 순간에, 재즈 선율과 함께 로맨틱 팝 '플라이 미 투 더 문'(Fly Me To The Moon)이 흘러나온다.
과감하면서도 아이러니한 OST(오리지널 사운드 트랙)는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흥행의 숨은 공신이다. 작곡가 정재일이 음악감독을 맡아 시청자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했다.
아카데미 4관왕을 차지한 '기생충'과 세계 83개국 넷플릭스 1위를 기록한 '오징어 게임'까지. 최근 글로벌 돌풍을 일으킨 K콘텐츠 배경음악을 만든 그를 서면으로 만났다.
정재일은 2연속 히트에 "어안이 벙벙하다"며 "운 좋게 매우 훌륭한 작품을 만났고, 마침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다 보니 음악까지 덩달아 주목해주신다고 생각한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2018년 겨울 황동혁 감독의 제안을 수락해 '오징어 게임'의 음악감독을 맡게 됐다. 황 감독이 연출한 영화 '남한산성'의 감동이 아직 뜨겁던 때였다. 정재일은 황 감독의 연출력을 믿었고, 몇 개월 후 두꺼운 대본을 받아들었다고 한다.
"감독님께서는 그냥 '음악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정도만을 던져주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스크립트를 펼치는 순간 또 편
정재일은 '오징어 게임' 대본 속 인간의 면면을 훑어보고 그들의 마음을 읽었다. 고작 '애들 놀이'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절박함, 나도 몰랐던 내 안의 교활함과 잔혹함,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알 수 없는 혼란함….
그는 게임 참가자들을 통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갇힌 절망"이 생각났다며 "벼랑 끝에 몰린 저 수많은 사람의 삶의 시작점을 되돌아보면 무엇이 있었을까를 상상했다"고 말했다.
상상은 영감이 됐고 차츰 '오징어 게임' OST 트랙 리스트를 채워나가게 됐다.
'오징어 게임' 음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아이러니와 괴기다.
죽음의 경고음이나 다름없는 기상나팔 소리로 청소년 퀴즈 프로그램 '장학퀴즈' 오프닝 곡으로 쓰였던 트럼펫 콘체르토를 사용했고, 참가자들이 게임장으로 들어설 때는 소고·리코더·캐스터네츠가 만들어낸 사운드를 삽입했다.
많은 시청자의 뇌리에 남은 '핑크 솔저스'는 작곡가 23이 만들었다. 분홍색 유니폼을 입은 병정들이 등장할 때 주로 쓰인 곡으로 '뚜뚜뚜뚜'라는 구음이 반복적으로 나오며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정재일은 보통 혼자서 모든 음악을 작업하지만, 처음으로 드라마 음악감독을 맡은 만큼 자신과 결이 다른 음악을 선보이는 뮤지션에게 도움을 청했다고 한다.
"두 시간의 영화에 쏟을 에너지를 아홉시간으로 늘리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제가 너무 얕본 거죠. 음악도 이런데 연출가는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쏟았을지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프로젝트 그룹 긱스에서 음악을 시작한 정재일은 영화뿐만 아니라 뮤지컬, 연극, 무용극, 창극, 아동극 심지어 전시회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음악을 선보이고 있다.
3·1 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대한이 살았다'를 만들고 5·18민주화운동 프로젝트에도 참여해 최근 음악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전방위 뮤지션으로 꼽힌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작품에 들어갈 때면 '내가 이걸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항상 앞선다"고 했다.
"제 어법과 재주로 소화해 낼 수 있는 이야기인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밝고 예쁘고 희망을 노래하는 이야기나, 헐리우드식의 몰아치는 음악이 필요한 작품에서는 제가 보여드릴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정재일의 작품 목록을 훑어보면 그의 말대로 가벼운 장르가 없다. 공통점은 대부분의 작품이 흥행하고 호평받았다는 것이다. 정재일은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겸양했다.
"전 그냥 매일매일 삶을 살고 있어요. 그 편린들이 언젠가 무엇인가 돼 나오는 거죠. 제가 막 실력이 갑자기 좋아진 것도 아니고, 계속 그냥 하다 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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